어려서부터 어머님은 짜장면보다 TV를 더 싫어하셨고
바보상자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호환 마마 같은 위협이 되길 바라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우스꽝스러운 단어가 꽤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아침 드라마에 슬슬 빠지기 시작한 어머니 본인이 몸소 증명해주셨다.
거친 설거지 소리가 동반되는 폭풍 같은 꾸지람은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이 눈 녹듯 깨끗이 씻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바보상자라는 단어에 확신을 준 것은 내 친구였다.
소주병을 무전기처럼 움켜쥐고는 췩췩 이재한 형사님 이재한 형사님
미래는 우리가 바꿔야 합니다 이러고 있는 녀석의 얼빠진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시그널'이 아니라 시부럴이었다.
그는 드라마가 만들어낸 진정한 드리머였다.
'신사의 품격'을 보면서 사십 대에도 연애가 가능하다며 아직 많이 남았다며
시궁창 같은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는 친구에게
너는 품격이 아니라 실격이라고 장동건도 아닌 주제에 이십 대 삼십 대도
안되면 사십 대도 안된다고 팩폭해도 견고했다.
오히려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들먹거리는 그의 포부를 보며
극단적인 긍정은 극단적인 부정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드랑이에 젓가락을 꽂고는 검을 뽑아달라며 '도깨비' 흉내를 내는 영상을
공유에게 공유한다면 헛게 보이는 허깨비 같은 표정을 지을까.
'비밀의 숲'이 재밌다며 냉혈한 조승우를 연기하는 요즘은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백만불짜리 다리는 아니고 대충 백만원정도 하는 싸구려겠지만..
최근 이 친구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알쓸신잡'이다. 사피오섹슈얼이라는 단어를
외치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가 뭔데 제시해대고 있었다.
사이코섹슈얼 아니냐고 반문하자 호모 사피엔스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귀동냥을
한걸 외쳐댄다. 호모라는 단어를 제발 강조해서 크게 얘기하지 말아줬으면 했다.
남자들이 모이면 정치 스포츠 등 이것 저것 떠들다 결국엔 여자 얘기로 귀결된다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잡지식은 많긴 했다.
그래도 학사 경고받아가며 겨우 턱걸이 졸업한 너랑 박사들의 지식이랑 비교가
되겠냐며 정신차리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섯시 내 고향'과 '세상에 이런 일이'로 중무장한 그의 쓸데없는 지식은 생각보다
광범위했고 '동물농장'과 '동물의 왕국'에서 습득한 지식은 여성층을 타케팅하기에
무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무리가 없는데 왜 지금 이러냐고 말하니 다소 주춤하며 물이 마시고 싶다더니
더욱 무리해서 시청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녀석인 건 확실하다.
아니 오히려 전혀 알고 싶지 않다.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블랙홀로 뛰어들어 이녀석을 만나기 전의 나에게 외치고 싶다.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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