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이유는 전염병 때문이다.www.wikitree.co.kr%2Fmain%2Fnews_view.php%3Fid%3D336788&locale=ko_KR&sdk=joey" style="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display: inline-block; position: absolute; left: 51.5px; top: 4098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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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적벽대전' 스틸컷
적벽대전은 조조군과 유비·손권 연합군이 장강 적벽에서 치렀던 유명한 전투를 말한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조조의 압승이 예상되는 싸움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조조는 대패했다.
소설 '삼국연의'에는 제갈공명이 천재성을 발휘해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되어있다.
제갈공명이 동남풍이 부는 것을 예상해 화공(불공격)을 제안했고,
그의 말을 듣고 주유가 황개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 화공을 써 조조군을 이겼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사 '삼국지' 위서 무제 편에서는 "큰 역병이 일어나 관리와 병사들 중에 죽은 자가 많아서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는 구절이 있다.
조조가 패한 핵심 원인은 전염병이라는 것이다. 불은 조조가 스스로 진영에 지르고 물러났다고 나온다.
6. 비록 적이지만 관우를 흠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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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TV '제왕을 꿈꾼 남자 - 조조'
조조는 관우를 훌륭한 명장이라고 판단하고 여러 차례 관우를 회유하려 했다.
하지만 관우는 유비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끝내 조조 밑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조조는 그런 태도마저 훌륭하다며 극찬했다. 여포가 타고 다니던 말 적토마를 관우에게 선물로 준 것도 조조였다.
조조와 관우는 서로를 한 번씩 살려준 적도 있다. 관우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성을 포위당했을 때 유비의 두 부인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조조에게 투항했다. 이후 관우는 백마 전투에서 조조를 위해 원소 부하인 안량과 문추를 베는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조조를 떠난다.
이후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조조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화용도를 지날 때 매복하고 있던 관우가 나타나 조조를 사로잡는다. 조조는 과거에 베풀었던 정에 호소하며 목숨을 구걸했고 결국 관우는 조조를 풀어준다. 관우는 이 일로 제갈공명에게 크게 문책당한다.
7. 여색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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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조 - 황제의 반란' 스틸컷
관우를 좋아했던 조조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양보한 것은 아니다. 유비가 조조와 함께 여포를 포위했을 때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관우는 여포의 장수 중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고, 관우는 이후에도 몇 번 더 찾아와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관우가 그토록 당부하는 진의록의 처가 궁금해 알아보기로 했다.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을 알자 조조는 그를 첩으로 삼았다. 그는 나중에 조조의 후궁인 두부인(杜夫人)이 된다.
조조는 여색 때문에 자식을 잃기도 했다. 적장 장제가 죽고 그 미망인을 조조가 억지로 취하자 장제의 조카 장수는 격분해 조조를 암습한다. 이 과정에서 아들 조앙이 죽고 조조는 겨우 살아남아 돌아온다. 조앙을 친아들처럼 사랑했던 정부인은 슬퍼하며 조조를 싸늘하게 대했고 결국 이혼 위기를 맞는다.
조조는 평생 정실부인 2명과 첩 13명을 두고 그 사이에서 자녀 34명을 낳았다. 부인들 중 절반 정도가 원래 다른 사람 부인이었다.
8. 뛰어난 문장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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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적벽대전' 스틸컷
조조는 뛰어난 지략가이자 장수이면서도 시인이기도 했다. 전쟁을 수행하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당시 백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알려진다. 그 중 하나가 '효리행'이다.
투구 갑옷 속에는 이가 끓고/만백성은 죽어만 가네
백골은 이슬에 젖어 들녘에 나뒹굴고/천리 안에 닭울음도 들리지 않는구나
산 백성은 백에 하나쯤인가?/생각하면 할수록 창자가 끊어지는구나.
조조 정권 시기 후한과 위나라에서는 뛰어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전해졌다. 그들의 문예활동을 당시 후한 헌제 연호를 따서 '건안문학'이라고 부르고 가장 출중했던 7명 문인들을 '건안칠자'라고 부른다.
9. 생전에 황제직에 오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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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조-황제의 반란' 스틸컷
조조는 위나라 시조이지만 생전에 황제직에 오른 적이 없다. 원소를 물리치고 서기 207년 중국 대부분 영토를 통일한 조조는 다음해 승상에 오른다. 213년 후한 헌제가 조조를 위공(魏公)에 봉하고 뒤이어 216년 위왕(魏王)에 임명하면서 조조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조조는 아들 조비가 220년 헌제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은 후 태조 무황제로 추존된다. 그해 1월 조조는 임종을 맞으며 측근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장례를 간소히 치르고 묘지를 호화롭게 꾸미지 말라." 하지만 조비는 화려하고 웅장한 장례를 치렀고, 이후 도굴을 염려해 무덤 옆 건축물을 철거한다.
일설에서는 조조가 도굴을 걱정해 가짜무덤을 72개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하지만 평소 근검절약을 중요하게 생각한 조조 성격에 비추어 보면 과장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10. 중국에서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나온다.
최근 중국에서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전에는 소설 '삼국연의'를 바탕으로 조조가 악인으로 그려지고 유비-관우-장비가 주인공인 영화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조가 주인공인 대중문화 컨텐츠가 많이 나오는 추세다. 그 중에는 2010년 영화 '조조-황제의 반란'과 2014년 중화TV 드라마 '조조' 등이 있다.